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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uYutaka Hiras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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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점심시간, 모두가 급식실로 향하고 나 홀로 교실에 남았다. 고개를 살짝만 올려도 운동장이 훤히 보이는 창가 옆자리에 앉아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소화가 다 되지도 않은 몸으로 열심히 축구하는 남학생들의 활기와 삼삼오오 모여서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여학생들의 명랑이 섞인 잡음은 오히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아침부터 은근히 괴롭히던 복통 때문에 급식을 건너뛰고 교실에 남은 건데 꽤 의외의 여유를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깥을 내려보다가 또다시 짙어지는 고통에 책상 위로 엎드렸다. 최대한 다른 곳으로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시금 감각을 곤두세웠다. 약하게 돌아가는 교실 선풍기 소리와 대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그리고 바람을 타고 들어온 은은한 풀 향기까지. 모든 게 하나같이 여름이 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갑자기 계절을 느껴서일까. 문득, 지난 여름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 여름은…

   온 땅에 노을빛이 드리우는 시각, 놀이터에 남은 아이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맞벌이인 부모님을 기다리는 동안 할 게 없었던 나는 그네에 앉아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햇빛 요정은 혼자 웅크리고 앉은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어요.”

   텅 빈 놀이터의 공허함과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외로움을 외면하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읽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그 어떤 공백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꼬마야, 거기서 뭐해?] 아이는 고개를 들어 햇빛 요정에게 말했어요.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아. 난 늘 혼자야.] 아이의 말을 들은 햇빛 요정은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어요. 그리고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어요. [그럼 나랑 같이 놀,”

“어?! 한 명 있다!!!!”

   갑자기 등장한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림책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모래가 묻을까 싶어 서둘러 책을 주우려는데 내 손 위로 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책을 잡고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시야에 꽉 들어차는 한 소년. 노을을 등에 진 채로 선 탓에 마치 소년의 등 뒤로 강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꼭, 그림책 속 햇빛 요정과 닮아 있었다.

   노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려 얼굴을 마구 가리는데도 소년은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오히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서 뭐해? 너 집에 안 가?”

“.....엄마 아빠 기다리는데?”

“여기서? 너 혼자?”

   순수한 의중인 걸 알면서도 혼자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싫었다. 그래서 괜히 모래가 묻지도 않은 그림책을 탁 탁 털고는 아까 읽지 못했던 장면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내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반짝이는 미소로 물었다.

“그럼 나랑 같이 놀래?”

[그럼 나랑 같이 놀래?]

그림책 속 햇빛 요정이 아이에게 물었던 것처럼.

「첫 번째 여름은 잊을 수 없이 강렬했던 햇살이었다.」

 

   두 번째 여름은…

“야 하민아, 진짜 괜찮다니까?!”

“내가 낯가리는 건데 왜 형이 괜찮다고 해요.”

   16살의 어느 토요일, 느닷없이 어디 좀 가자는 노아 형의 부름에 목적지도 모른 채 걸음을 옮기던 길이었다.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다다르고 나서야 알게 된 목적지는 다름 아닌 근처 동네에서 열린 축제였다. 그저 축제를 즐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순순히 따라갔겠지만 그곳에는 노아 형의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걔 진짜 착해.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서운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것은 나를 자신의 친구와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평소 낯가림이 심한 탓에 낯선 이와 맞닥뜨리는 걸 굉장히 어려워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반갑지도 않은데 반가운 척 얼굴을 밝혀야 하는 것도 꽤 큰 에너지 소모였다. 게다가 동갑도 아니고 3살이나 많은 고2 형이라니‥. 벌써부터 마주할 순간들이 막막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호기심이 감돌았다.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노아 형이 이렇게까지나 굳이 소개해 주려고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일말의 호기심 어린 기대를 품고서 불편한 걸음을 옮긴 곳은 야외공연장이었다. 사실 공연장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 축제의 메인이벤트인지 관객들이 생각보다 많이 앉아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안 늦었나 보네.”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응, 저-기.”

   형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파란 머리의 그는 고요의 여유를 한껏 머금은 얼굴로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그대 나의 작은 심장에 귀 기울일 때에-”

   그 어떤 반주도 없이 잔잔히 퍼지는 목소리는 자연스레 귀를 집중시켰다. 살짝 후더운 공기가 차츰 식어간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청량한 음색은 부드러움까지 더해 듣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반주가 깔리기 시작했음에도 오히려 선명해지는 목소리에 저절로 두 눈을 감았다.

“쟤랑 밴드 하려고.”

   음률이 흘러감에 따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을 천천히 이어가다, 옆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노아 형의 목소리에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시금 시야에 그가 가득 들어차자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눈을 아무리 비벼봐도 사라지지 않는 반짝임. 그리고,

“쟤랑 함께 하는 무대는 분명 멋질 거야.”

   그와 같은 무대를 꿈꾸는 노아 형 역시 같은 반짝임을 품고 있었다. 그 순간, 마음 주위를 오랫동안 어지럽힌 무더위가 씻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민아, 내년이면 고등학생인데 장래희망은 미리 생각해놓는 게 좋지 않을까?’

‘죄송해요, 선생님. 아직은‥ 하고 싶은 게 없어서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분명 하고 싶은 게 생길 거야.’

‘정말‥ 생길 수 있을까요, 선생님?’

‘당연하지. 꿈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는 거거든.’

   반신반의했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건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때문이었다.

   나는 노아 형과 저 사람처럼 반짝일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기회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그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심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야 남예준! 여기!”

“무대 봤어? 나 너무 긴장해가지고 너 찾지도 못했는데.”

“당연히 봤지. 쟤 데려오느라 하마터면 늦을 뻔 했지만.”

“어? 안녕하세요-.”

   노아 형의 끝말에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은 거리낌 없이 인사를 건넸다. 반짝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 차마 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얘가 낯을 좀 많이 가려. 안 그래도 여기 안 오겠다고 어찌나 고집을 피우던지.”

“그럼 그냥 혼자 오지. 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어.”

   시간이 흐를수록 나와 두 사람의 채도 대비가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점점 무채색으로, 두 사람은 점점 더 밝고 다양한 유채색으로. 시나브로 옅어지는 존재감에 시무룩해질 찰나.

“그래도 와야지. 같이 밴드 할 멤버인데.”

   내 오른쪽 어깨 위로 노아 형의 손이 턱 얹혀졌다. 동시에 차차로 퍼져나가는 색감. 어깨를 시작으로 퍼지기 시작한 색은,

“이제 알겠어? 내가 널 왜 억지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어느덧 두 사람과 비슷한 계열로 흐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여름은 한여름 낮의 꿈이었다.」

 

“앗, 차가워.”

“덩치도 산만한 애가 밥을 왜 안 먹어.”

첫 번째와 두 번째 여름이 지난 지금.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아서요.”

“그럴 줄 알고 우유 가져왔지.”

“또 우유 먹기 싫어서 저한테 가져온 거죠?”

“너 키 크라고 가져온 거지.”

난 여전히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옅게 남아있는 색감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노아 형.”

“응?”

“왜 저였어요?”

지난 여름을 추억해서일까, 늘 속으로만 품고 있던 의문을 속상히 툭, 뱉어냈다.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이면 나였냐고. 굳이 날 껴주지 않아도 완벽했을 이 밴드에 왜 날 합류시킨 거냐고.

“그냥.”

“‥네?”

“그냥, 너랑 하고 싶었어.”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할 법도 한데 노아 형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오히려 손쉽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의문을 품고 있던 내가 바보라 느껴질 만큼. 너무나도 쉽게. 그 수월함이 내 색감을 더 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뭐야? 표정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습이나 하러 가요.”

“뭐야, 뭔데.”

연습실에 가는 내내 노아 형은 꾸준히도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색을 갖게 해준 노아 형이니까. 감히, 색을 잃어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 왔다-.”

“지각하는 줄 알았는데 빨리 왔네요, 형?”

“은호 너도 왔는데 내가 늦을 수가 없지.”

“하민아 밥 안 먹었다면서, 어디 아파?”

“밥 안 먹었어? 쫀디기 줄까?”

“그냥 조금 속이 안 좋아서요. 괜찮아요, 예준이 형. 쫀디기도 괜찮아요, 봉구 형. 연습 끝나고 보건실에 가면 돼요.”

“그래? 그럼 오늘은 조금만 맞춰보고 일찍 끝내자.”

“오케이~”

예준이 형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저 자리에 서기만 했을 뿐인데 형들은 가지각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색이지만 하나같이 행복히 웃는 얼굴들.

그 표정을 부러워하다 연주의 시작을 놓쳐버렸다.

“야, 유하민- 뭐하냐-.”

“아,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괜찮아, 다시 해보자!”

은호 형의 드럼 스틱이 부딪히는 소리를 시작으로 연주가 다시 시작됐다. 귀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찬 드럼 소리, 귀를 짜릿하게 만드는 일렉 기타 소리, 귀를 설레게 만드는 피아노 소리, 마지막으로 귀를 부드럽게 감싸는 보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조화로운 연주 속에서 유일하게 베이스만 길을 잃었다.

방황을 자각하자,

‥아! ‥민아. 하민아!”

“어, 아, …죄송합니다.”

“뭐야, 유하민. 너 왜 그래.”

“하민아 속 많이 안 좋아?”

더는 연주를 할 수가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 저 오늘 보건실 좀 갈게요.”

   발끝부터 밀려오는 수치심에 결국 도망치듯 연습실을 뛰쳐나왔다. 등 뒤로 걱정 어린 형들의 외침이 어렴풋이 들려오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이대로 멈추면 그대로 수치심에 휘덮일 것만 같아서.

 

“자, 종례 끝. 야자 열심히 해라.”

   오후 수업 내내 엎드려 있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정신 차려보니 종례가 끝나 있었고, 반 친구들은 야자를 준비하거나 책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을 나섰다. 미리 담임 선생님께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나도 친구들을 따라 가방을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살짝 몽롱한 눈을 비비며 교실을 나오다 의외의 등장에 걸음을 멈췄다.

“형아가 집에 데려다줄게!”

“‥형 저랑 집 반대편이잖아요.”

“나 오늘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얼른 가자!”

   다른 형들이면 모를까, 제일 반대편에 사는 봉구 형이 대뜸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니까 순간 아직도 꿈인가, 착각이 들었다. 거절할 틈도 없이 바로 손목을 잡아끄는 봉구 형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결의에 차 보였다. 평소에 즉흥적으로 움직이기보다 여러 생각 끝에 움직이는 형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까 연습실을 도망쳐 나온 것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아프다고 해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이제 더는 내가 필요 없어졌다고 말하려고 하는 건가.

“우리 이번에 대회에 나가는 곡 있잖아. 그거 제목을 뭐로 하면 좋을까?”

“….”

“아까 형들이랑 은호가 후보 여러 개 던졌는데 다 별로더라고. 하민이 너는 어때?”

“딱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회인데도 내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미래처럼 여겨졌다. 예전 같았다면 봉구 형이 묻기도 전에 여러 아이디어를 내면서 어떤 게 더 좋냐고 막 물어봤을 텐데.

“난 후렴 들어가기 전에 베이스 소리가 너무 좋더라. 하민이가 그 부분을 진짜 잘 살리는 것 같아.”

형도 달라진 낌새를 느낀 건지 분위기 전환을 위해 화제를 바꿨지만,

“나도 나중에 베이스나 배울까?”

“형이 그런 걸 왜 배워요.”

“‥어?”

오히려 내 자격지심에 화재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런 건 저 같은 애나 배우는 거죠. 전 어차피 이 밴드에 뒷받침을 해주러 온 사람이잖아요. 저 같은 사람이나 튀지도 않는 베이스를 연주하는 거죠. 베이스는 원래 그런 거예요. ‥처음부터‥ 그런 역할이었어요.”

“….”

“솔직히, 솔직히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니,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 없이도 형들은 잘하잖아요. 굳이 제가 있지 않아도 되잖아요. 굳이 저 같은 게,”

“그만.”

단호히 내 눈을 손으로 가린 봉구 형으로 인해 뿌예진 시야가 단번에 어둠으로 뒤덮였다. 시각이 차단되자 감각은 자연스레 격해진 숨소리로 집중되었다.

“일단 심호흡부터 해.”

형의 신호에 따라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거세게 치솟던 감정의 파도도 차츰 고요를 되찾았다.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았음을 확인한 형은 나지막이 말했다.

“하민아 곧 있을 대회를 상상해 봐.”

“….”

“은호 녀석은 신나서 드럼을 치고 있고, 난 그런 은호를 노려보면서 일렉을 연주하고, 노아 형은 또 막 웃으면서 피아노를 치고, 예준이 형은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겠지? 근데 난 있잖아. 그 장면에 네가 없는 게 그려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없으면 그 무대는 완성되지 않아, 하민아. 베이스가 깔아주는 역할이라고? 누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베이스는 음악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야. 베이스 없는 음악이 얼마나 허전한데.”

“….”

“우리는 이 곡으로 분명 멋진 무대를 마치고 내려올 거야. 무대를 마친 우리 다섯 명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을 거고.”

마지막 말을 끝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내려가고 다시금 마주하는 현실 속에 가득 들어차는 형의 얼굴에는,

“딱 한 번만 날 믿어봐, 하민아.”

그 무엇으로도 의심할 수 없는 강한 확신으로 가득했다.

 

   그날 밤. 침대 위에 베이스를 꺼내 놓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대회에서 형들과 같이 빛날 수 있을까? 민폐가 되는 건 아닐까? 봉구 형의 확신에 힘입어 마음을 다잡으려는 자아와 여전히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한 자아가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사실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해답을 찾으려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그렇게 한동안 스스로 괴롭히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어디선가 어렴풋이 날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민아!! 유하민!! 나와봐!!”

   무의식에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8시 20분이었다. 누군가가 찾아오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당한 시간도 아니었다. 딱히 올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어 보니,

“하민아 속 괜찮아?”

다름 아닌 은호 형이었다.

“형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저녁 먹다가 갑자기 네가 생각이 난 거야. 아까 속이 너무 안 좋은 것 같길래 저녁은 잘 챙겨 먹었나 걱정이 돼가지고! 근데 또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짠!”

맑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들어 올린 봉투에는 온통 먹을거리로 그득했다.

“오늘 점심도 못 먹었는데 저녁도 굶으면 배고플 것 같아서 이것저것 왕창 사들고 왔어!”

‘나 완전 잘했지?!’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이는 은호 형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반응에 더욱 신이 난 은호 형은 봉투를 벌려서 사 온 것들을 마구 설명했다.

“이건 하민이가 좋아하는 빵! 이건 하민이가 좋아하는 음료수!”

“이거 주려고 집까지 온 거예요?”

“아니? 이거 말고 또 줄 게 있어.”

“뭔데요?”

   손에 쥔 거라고는 먹을거리로 가득한 봉투밖에 없는데 또 뭘 준다는 거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형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하민이 너는 잘생겼고, 키도 크고, 생각도 깊고, 형들을 잘 챙겨주고, 센스도 좋고, 장난도 잘 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애교도 많고, 아이디어도 좋고, 베이스도 잘 치고, 말도 예쁘게 하고, 체력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잘 먹고, 성실하고, 노력도 잘하고, 항상 성장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게임도 잘하고, 기억력도 좋고, 잘 웃고, 귀엽고, 친절하고, 춤도 잘 추고, 요리도 잘하고, 어른스럽고, 옷도 잘 입고‥ 하아 후 더 말할 수 있었는데.”

   봉투에 든 먹거리보다 더 묵직한 칭찬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무방비로 마주한 속사포 칭찬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결국,

“풉. 푸흐흐흐하하하하핳”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에? 엥?”

“아닣ㅎㅎ 형 그게 뭐예요-!! 아니 왜 갑자기 칭찬읋ㅎㅎㅎㅎ”

   살면서 들을 칭찬을 한순간에 다 받은 기분이었다. 온통 부정과 자기혐오로 뒤덮여서 칭찬이 먹힐 수가 없는 상태였는데 반박도 할 수 없게 마구잡이로 들어오니까 그냥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눈물이 날 만큼 한바탕 크게 웃고 나니 어느덧 온기가 온몸에 퍼져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여러 의미를 담은 질문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제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네. 덕분에요.”

“오케이! 그럼 난 이제 줄 거 다 줬으니까 간다~”

“진짜 이거 주려고 온 거예요? 같이 안 먹어요?”

“노아 형이 운동하러 가자고 해서 가야 해. 내가 사준 거 오늘 다 먹고 자 알았지? 간다~!”

   시원히 발걸음을 돌린 은호 형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봉구 형.”

- 응, 하민아. 무슨 일이야?

“곡 제목, 여름 어때요?”

- 여름?

“네. 왠지 우리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 여름‥.

“별로예요? 아님 다른 걸로 생각해 볼까요?”

- 아니? 여름 좋은 것 같아. 좋다. 내가 형들한테 전화해서 바로 말할게. 너무 좋은 제목이다, 하민아.

“고마워요, 형. 그럼 내일 봐요.”

- 응. 내일 보자. 

「세 번째, 네 번째 여름은 소나기를 막아주는 우산이었다.」

 

   봉구 형과 은호 형 덕분에 정신 차리고 마음을 다잡은 결과, 이제 더는 무채색에 휩싸이지 않았다. 아직 형들처럼 자기만의 빛깔로 반짝이진 못해도 빛을 잃었다는 기분만큼은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나로 인해 연습은 순조롭게 흘러갔고 [여름]을 들고 올라간 무대에서 우리는,

“1등은 ‘여름’이라는 자작곡으로 멋진 무대를 보여준 플레이브입니다!”

뜨거운 성과를 이뤄냈다.

   다섯 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연습하고 노력해서 얻게 된 1등은 큰 심지가 되어 모두의 마음을 불태웠다. 서로의 집에 드나들면서 밤새 노래를 만들고 방과 후에는 무조건 모여서 연습하고, 그런 날들을 계속하다 보니 우리의 여름은 어느새 여섯 개가 되어 있었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반짝이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나도 어엿한 빛깔을 갖게 되었고 매일 차고 넘치는 아이디어를 서로 의논하면서 만들어내는 과정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 시간으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의 다섯 번째 여름은 화양연화 그 자체였다.

그렇게 여름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그건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뭐? 다시 말해 봐. 뭐라고?”

누군가를 잘 안다는 건, 상처를 주기도 쉽다는 말과 같았다. 작은 의견 다툼으로 시작한 갈등은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닌 크나큰 태풍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노아 형과 예준이 형이 두 형들을 잡고 말렸지만 이미 불기 시작한 강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나가면 되겠네! 그럼 다 해결되는 거 아냐!!”

“야, 도은호! 그만하라고!”

“그래, 꺼져! 너 없어도 여기 아무 문제 없으니까!”

“봉구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만해!”

분노에 휩싸인 태풍의 눈은 이곳저곳을 부수기 시작했다. 말리는 형들까지 더해져 부딪히다 결국,

쾅-.

보면대가 엎어졌다. 동시에 바닥에 흩뿌려지는 악보들. 그건 노아 형과 예준이 형이 졸업하기 전, 우리의 마지막 여름이었던 [일곱 번째 여름]이었다.

“안 돼‥!”

그것만큼은 지키기 위해 곧바로 몸을 움직였지만 이미 사정없이 밟혀서 찢기고 그 위로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버렸다.

“꺼져줄 테니까 알아서 잘 해봐 그럼!!”

가방을 챙겨 들고 연습실을 나서려던 은호 형 역시 악보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지만,

“‥일곱 번째 여름은 무슨.”

찰나일 뿐이었다.

“하아, 내가 은호 따라가볼게.”

“됐어요. 지가 가겠다는데 뭘 따라가요.”

“봉구야 너 진짜 왜 그래.”

“‥오늘은 이미 끝난 것 같으니까 저도 먼저 가볼게요.”

“야, 채봉구!”

   태풍이 사라진 연습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얼어붙은 몸으로 겨우 찢긴 악보를 주워보지만 이미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멈춰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예준이 형은 떨리는 내 손을 감싸며 조심스레 위로를 전했다.

“괜찮아, 하민아. 이건 잠시뿐일 소나기일 거야.”

하지만,

“금방 지나갈 거야.”

우산을 잃은 우리의 여섯 번째 여름은 결국 혼돈을 지나지 못했다.

 

“맞아-. 이때 하민이 네가 형들이랑 연습 더 오래 하고 싶다면서 시무룩했었잖아-.”

“아, 엄마- 10년도 더 된 얘기를 왜 갑자기‥.”

   여전히 나아가지 못한 여섯 번째 여름을 마음 한편에 머무른 채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다.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어 서른을 마주하기 전, 이삿짐을 정리하다 무심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첫 대회에서 1등을 한 날에 다 같이 트로피를 들고 찍었던 단체 사진이었다.

“이 사진 보니까 생각나서 그렇지. 이때 네가 정말 행복해했었는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연습실에 모이지 않았고 노아 형과 예준이 형의 졸업식에도 두 형들은 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고 바쁘게 살다 보니 서로 안부를 묻는 것도 줄어들게 되었고 이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볍게 연락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

“노아 형이 매일 놀린다고 해도 좋아하며 따라다녔고, 예준이 형은 세상 다정하고 친절하다면서 좋아했고, 봉구 형은 귀엽고 듬직하다면서 좋아했고, 은호 형은 자존감 지킴이라면서 칭찬도 잘해주는 좋은 형이라고 했었잖아.”

“‥그랬었죠.”

   오래된 시간을 그리워해서일까. 정말 얇디얇은 사진 한 장인데 큰 돌덩이를 든 것처럼 버거웠다. 천천히 사진을 돌려 뒷면을 보면 잊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가득 담아 썼던 ‘여름’이라는 두 글자가 바래지 않은 채로 자리했다. 그리운 마음에 한 번, 보고픈 마음에 한 번, 미안한 마음에 한 번, 고마운 마음에 한 번, 사랑하는 마음에 한 번. 글자 위를 어루만지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던 찰나.

“응? 누구한테 전화 오는데?”

“어?”

엄마가 건넨 핸드폰 화면 위로 그 어느 때보다 찬란히 떠오른 이름 하나.

[여름]

그렇게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일곱 번째 여름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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