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기...”
톡톡. 조심스러운 손길이 다가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쪽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내자 들리는 건 여름의 매미 울음소리였다.
“상담. 선생님이 부르셔.”
“아, 고마워.”
조심스럽게 교실 문을 닫고 복도를 가로지른다. 교실 안은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복도로 나오자마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교실을 나선지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얇은 하복 와이셔츠가 땀에 절여져 몸 군데군데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
“선생님.”
“어어. 예준이 왔니? 여기 앉으렴. 종이 들고 왔지? 그래서, 과는 저번에 말한대로 적을 생각이고?”
“아... 아마 그럴 것 같아요.”
“경제학이나 경영학 쪽은 관심없니? 이쪽이면 조금 더 높은 대학들도 넣어볼만 할 거 같은데.”
“음... 아니요. 부모님은 제가 의사가 되길 바라셔서요.”
“아, 그래? 그럼···.”
그 이후로는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만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그냥 성적에 맞춰 부모님이 원하시는 과에 그리 낮지 않은 대학. 2년 반 동안의 소산물이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갈 줄 알았던 대학은, 누군가에겐 전혀 당연하지 않았음을. 학교가 있는 지역 그리고 이름, 이 두 가지에 따라서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운다는 것을. 조금 일찍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노력했다. 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 그럼 선생님은 이렇게 쓰는 걸로 알고 있을게? 종이는 도로 가져가도 돼. 다음은··· 이뚝스 좀 나오라고 해줄래?”
“네. 감사합니다.”
탁-
교무실 문 바로 앞, 한참을 가만히 서서 종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리 길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2~3분정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갑했다. 마치 중학교 교복마이를 어거지로 갖춰 입은 느낌이라고 해야 될지. 잘못된 옷을 입는 것만 같았다. 멍한 느낌이 지속됐다. 조심스레 한 발씩 떼는데 덥고 습한 공기가 몸 안에 빈틈없이 얹혔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헤집는 온갖 더부룩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문득 보게 된 창밖 속 하늘은··· 곧 비가 오려나?
-
“그래서 형은 대학 어디어디 쓸 거예요? 과는 정했어요?”
“그럼 곧 수시원서 접수해야 될 텐데 아직까지도 예준 형이 과를 안 정했겠냐?”
“아니 형은 좀 가만히 있어요;; 왜 자꾸 시비야.”
“어쭈? 이게 등치 다 컸다고 형한테 말대꾸냐?”
“그럼 형은, 형이란 사람이 말이야. 키는 쪼꼬매가지고 동생을 이겨먹으려고 그래요?”
“우리 핑쪼가 조꿈 작긴 하지?”
“아니 형!!”
“아니 그래서 형은 어디 갈 거예요? 공부 잘하잖아요.”
“니 의사하는 거 아니었어?”
“우와. 형 의사할거예요?”
“하하...”
굳이 꺼내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 버리면 어쩔 수 없이,
“오. 신기하다. 나는 형이 음악 할 줄 알았어.”
“...”
표정이 굳어가고 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 몸의 기능이 잠시 동안 멈추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까매지고, 마치 어두운 심연 아래 홀로 남은 느낌. 주변 말소리들이 깊은 바다 그 끝에 빠져 웅웅거리고 멋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정말로 갑작스레 굳어버린, 이런 느낌 정말 싫어하는데.
“어, 근데 그건 나도 동감.”
“그치! 아니 나는 밴드부 처음 들어왔을 때- 예준이 형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진짜 형은 노래도 잘하지이, 작곡도 할 줄 알고, 잘생기구, 또 성격도 좋고오-”
“야. 방구야. 주니 칭찬만 하며는 내가 섭섭하자나아-”
“아익, 당연히 형도 짱이죠.”
“뭐야핰ㅋ 채봉구 당황했는데?”
“근데 조금 의외긴 하다. 난 당연히 실음 쪽 지망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럼 의학? 의예과 같은 데 가는 거예요?”
“아마…도.”
“진-짜 아깝다 형. 형 진짜 재능 있는 거 같애 내가 봐쓰땐. 진짜 형 노래 진짜 잘하는데 진짜 아깝다 진짜...”
“형들이 먼저 실음과 들어가고 그 다음에 채봉구랑 나랑 딱 들어가서 지금처럼 같이 지내면 좋은데, 아쉽다.”
“야핰, 으노야.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냐. 이 입시 생태계를 알라믄 아직 한참 멀었다. 그러니까 내가 전에 같이 운동하자고 했을 때 같이 했으면 좋았자나-”
“아니 노아형, 그건 그냥 형 사심 채우는 거 아니에요? 운동이랑 입시랑 무슨 연관이 있어.”
“아핰핰 실버호 지쨔. 내가 거기 헬스장 같이 가면 어? 운동하는 김에 입시 설명도 좀 해주고 그랬게찌잌핰 지짜앜-”
“근데 예준이 형은 왜 의사 하고 싶어요? 난 아직 못 정했는데. 어쩌다가 정해진 거예요?”
“와- 그러니까 형. 어쩌다 의대를 진학할 생각을 했어요? 의사는 너무 재미없을 거 같은데. 돈 때문에?”
“하하… 그냥, 부모님이 원하시니까 가는 거지 뭐... 사실 성적만 봤을 땐 조금 아슬아슬하긴 해.”
“야. 누가 부모님이 원한다고 해서 가냐? 그 논리면 전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 다 의대 갔게? 너니까 하는 거지. 이래놓고 합격하면 징챠 레드아이즈야. 징쨔.”
“형 근데 진짜 노래 쪽은 갈 생각 없어요? 형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지 않나?”
“은호야. 너였으면 의대 갈 성적 되는데 실음과를 가겠냐? 무조건 의대 가야지.”
“나는 의대 붙여준다고 해도 노래할 건데? 형은 아니에요?”
“나는··· 그래도 당연히 의사할 거 같은데. 내가 의사랑 잘 맞을지 어떻게 알아.”
“와... 봉구형 그럼 노래 버리는 거야? 진짜- 난 형이 그럴 줄은 몰랐어.”
“아니 그 뜻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따져보는 거지. 예술 쪽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대다수인거 몰라? 의사 되면 수입은 그래도 좀 안정적일 거 아니야. 너 성공할 거란 자신 있어?”
“난 성공할 거 같은데? 무조건 성공할 건데? 나 좋아해주는 팬들이랑 평생 행복하게 노래하면서 살 건데?”
“그러다 실패하면, 그러면 어쩔 건데!”
“형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몰라요? 나는 내 팬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끝까지 노래하고 무대 위에 설 거야! 왜, 형은 음악에 이만큼 진심은 아닌가봐?”
“아니 이 새끼가 진짜!!”
“야핰핰핰ㅋ하 너히능 이렁 걸루두 싸우냨핰 징챻 아핰 배아펔ㅋ”
“아, 야 채봉구! 나 진짜 아프다고 아; 왜 때리는데 아아!!”
“은호야 아까도 말했지. 시비 털지 마라고. 발전이 없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알았어요! 미안해요, 미안해. 그래서 형. 노래 엄청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봤을 땐 그랬는데···”
-
‘···그런가.’
‘... 잘 모르겠는데.’
보통 자신이 무언갈 좋아할 때 내가 그걸 좋아한다고 인식하던가.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끌리는 거 아닌가. 되게... 홀리는 것처럼.
도통 집중이 안 된다. 칠판 앞 열심히 설명하시는 선생님을 두고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따라 이상한 것 같았다. 집중을 하려 두 눈 바짝 뜨고 칠판을 바라보고 있어도 머릿속에서 그 음성이 떠나질 않는다. 좋아하냐고? 물론 좋아하지. 취미로서. 철없던 어린 시절을 제외한다면 한 번도 노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밴드부도 취미였고(물론 멘토링 동아리나 봉사 동아리처럼 세특에 유리한 동아리를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상상은 허왕된 망상이라고만 치부해왔다.실제로도 그게 맞았다. 그 몫은 모두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 그니까 조금 추상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다고나 할까.
그 선택받은 사람들 무리에 난 속하지 않았다. 은호는 재능이 있으니까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니까 적어도 난 아니었다.
‘... 라고 생각해왔는데.’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 뇌가 지끈지끈 아려왔다.
‘도저히 더는 못 들을 것 같네.’
나는 최대한 조용히 하지만 신속하게 짐을 챙겨 슬며시 학원 밖으로 나왔다. 혼란스러웠기에. ...근데 보통 혼란스럽다가 조퇴 사유가 되던가...? 뭐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따위가 없었다. 수업도중에 나왔으니 적어도 학원이 끝날 시간까지는 밖에서 버티다 들어가야 했다. 그니까 대략··· 1시간정도.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도로 내뱉었다. 이런 일탈은 또 처음인 것 같은데. 그동안 너무 모범적으로 살았나? 꽤나 충동적인 행동이었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하아, 사춘기도 제때 오는 게 복이라더니...”
-
그 뒤로는 정처 없이 학원가 주변을 떠돌아 다녔다. 평소엔 급하게 뛰어가느라 보지 못했던 학원 주변 풍경들은 감회가 새로웠다. 저런 곳에 분식집이 있었는지도, 세 번째 가로등이 고장 나서 자꾸 깜빡거리는 것도, 또···
“...”
저기 공터 앞에서 버스킹을 한다는 것 또한··· 전혀, 진짜 아예 모르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위는 아니어도 은은하게 비치는 누런 가로등 불빛 아래, 감미로운 기타소리와 그에 걸맞은 부드러운 목소리. 별것이 아님에도 눈길을 끌었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순간을 즐기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등을 함부로 돌릴 수가 없었다. 가슴 한 편에 시원한 물보라가, 아무리 힘차게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애타게 뻗어도 닿지 않는 저기 먼 하늘의 별과 태양처럼. 하지만 그 끝엔 오로지 동경과 선망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놓은 줄만 알았던 꿈은 아직 닿지 않았을 뿐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언젠간 진짜 포기해버릴 스스로를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깊은 울림을 주는 이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나 남예준은, 한 번도 노래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
“엄마. 할 말이 있는데요.”
“무슨 말인데?”
“그...”
두 눈 딱 감고 한 번에 말하고 싶었는데 손에 깃든 잔 떨림이, 빠르게 요동치는 맥박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 이 모든 게 감히 허락해주지 않았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걸 버리고 의대 진학을 포기한다고 말씀드린다면 엄마의 반응이 어떨지. 나는 부모님이 내게 건 모든 기대와 희망을 다 내칠 만큼 나쁜 아들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를 나쁘다고 표현할 순 없겠지만. 통상적으로 우린 이걸 잘했다고 하진 않지 않나. 그래도 나는 바랬다. 미래의 내가 의료도구가 아닌 마이크와 악기를 잡는 사람이기를. 꼭 대학 진학을 그 쪽으로 가진 못하더라도 날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하나쯤은 있는 삶을 살기를.
“갑작스러우시겠지만 노래를 하고 싶어요. 엄마가 바라는 의사 같은 전문 직종이 아니라요. 대학원서도 다시 고민해보려고요. 물론 시간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굳이 실용음악과가 아니더라도 관심 없는 의과 대학이 아닌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닿는 곳에 진학하고 싶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럼 지금껏 네가 쌓아왔던 것들은? 네가 투자한 시간들과 노력은?”
“그것들이 아예 소용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방향성은 조금 달랐을지 몰라도 분명 언젠간 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네가 예술을 한다고 한들 그걸로 밥을 벌어먹을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니? 왜 그런 불확실한 모험적인 길을 택하려는지 엄만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제게도 돌아오는 기회를 잡는다면 기적이 이뤄지리라 믿어요.”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안 돼. 지금까지 엄마랑 아빠가 너에게 투자한 게 얼만데 그런 소릴 하니?”
“왜요? 엄만 내 꿈이 아닌 엄마의 꿈을 위해 투자한 거잖아요. 그게 오로지 저를 위한 거였다고요? 난 바라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해! 그만하고 얼렁 들어가서 자.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항상 말 잘 들었잖아요! 엄마가 하라는 거 군말 없이 잘 따랐는데 왜 이제는 내가 바라는 거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엄마 피곤하니까 그만 말해! 빨리 들어가서 자!”
“저도 이제 곧 어른이란 말이에요! 제 미래에 관한 선택지 정도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잖아요! 제가 뭘 더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귀한 아들 꿈 하나 응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래 이 엄마는 속이 좁아서 지금까지 해온 거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니 편을 들어주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렵다! 그렇게 엄마 말 듣기 싫으면 그냥 나가! 나가서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
적어도 엄마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쉽지 않을 것이리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 편이어야만 하는 우리 엄마는 내 편이길 바랬다. 사실 은연중에 엄마는 내 편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우리 예준이를 응원한다고, 예준이가 원한다면 엄마는 다 상관없다고 그리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툭 투둑.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다. 어쩐지 학교에서부터 우중충하더니. 아침 일기예보에는 비소식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일기예보는 별 믿을만한 게 되지 못하다는 생각 따위를 하며 빗물 사이를 달렸다.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빗물 덕에 나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시원하니 기분이 나았다. 아무래도 평소에는 이럴 일이 잘 없어서 몇 분정도 비를 맞고 나니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규칙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비로부터 피해 잠시 벤치에 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부터 난 음악을 좋아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꽤나 들었던 것 같은데. 난 어쩌다 이 꿈을 잊고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조금씩 크면 클수록 그저 자연스레 현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세상엔 재능 있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난 그들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 그들에 비하면 나는 꿈을 갈망할 만큼의 가치가 없는 사람은 아닐지 항상 고민했다. 꿈을 갈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갖추어져야 비웃음을 사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나도 이르게 알아버린 탓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와 함께 오디션을 보러간 적이 있었는데, 구경만 하겠다던 친구는 회사 직원분의 말을 따라서 재미삼아 오디션을 봤고 몇날 며칠을 기다려도 나에게는 합격문자가 오지 않았다는 것. 학교에서 다시 만난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 “너도 합격했어?”였을 때의 그 박탈감과 열등감. 그리고 내가 그렇게 꿈꾸던 그 기회를 그 아이는 재미삼아 본 것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버렸을 때의 비참함과 허무함, 분노. 그날 밤 주방 식탁에서 아는 아주머니와 전화하는 엄마의 입에서 나는 재능이 출중하지 못하다는 내용들과 어렴풋이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내 사람의 객관적인 비평. 그 우연들은 내 꿈을 단순히 어렸을 적 다들 한 번씩은 꿈꾸는 별 볼일 없는 장래희망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이런 생각들은 끝없이 나 자신을 갉아먹고 또 갉아먹어서 나를 다치게 만들었고, 더 이상의 아픔이 두려웠던 난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꿈을 잠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과거의 미련을 놓지 못하고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었고, 내가 항상 급하게 학원에 뛰어가야 했던 이유는 밴드부 애들과 함께 노래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학원에 가는 길이 조금은 힘들지라도 행복에 조금 더 오래 잠겨있을 수 있다면 그 힘듦을 감내하는 것마저도 행복해서.
어쩌면 나에게 밴드부라는 존재는 나의 삶 속 유일한 쉼터이자, 마음 속 깊이 잠든 꿈을 외면했던 내 삶을 향한 유일한 부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애들과 그 존재가 나에게는 너무 소중해서 놓고 싶지 않았다.
-
“야아-! 남예주운!”
“어어- 노아야...”
“뭐냐. 남예준 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그냥 어제 비를 좀 맞아서... 하핳”
“어쩐지 니가 왜 날 안 찾아오나 했다. 근데 어쩌다가 비를 맞았어? 비가 밤 늦게 오지 않았나?”
“아... 별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엄마랑 조금 싸워서.”
“뭐? 니가? 너희 어머니랑 싸울 일이 뭐가 있어.”
“음악이, 노래가, 나한테 너무 소중해서. 그래서 싸웠어.”
“...”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들에게 사랑을 주는 삶을 살고 싶어서.”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하하핳ㅎ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
“이짜나 준아.”
“...으응.”
“너는 나의 소중한 친구로서 네가 행복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
“너를 위해 니 자신을 헌신하는 그런 삶 말이야.”
“...”
“그러니까 비 맞고 아프지도 말고. 사람이 말하는데 자면 쓰나- 아주 그냥 딱밤을···!”
지잉-
“··· 야 내가 일부로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제 너 좋을 대로 일이 풀리려나보다. 일어나면 어머니께 사과드리고. 알았냐.”
“...”
“잘 자 준아. 좋은 꿈 꿔.”
“형-! 예준이 형 오늘 급식 안 먹는대요?”
“야아...! 예준이 형 지금 자고 있잖아...! 조용히 말해...!”
“엥, 예준이 형 지금 자요?”
“아핰ㅋ. 지금 남예준 자고 있으니까 우리끼리 밥 먹으러 가자. 쟤한텐 나중에 삼각 김밥 하나 사주면 돼.”
“그래도 밥은 먹어야···.”
지잉- 지잉-
[엄마: 예준아, 엄마가 밤 동안 생각을 좀 해봤는데. 엄마가 너무 엄마 생각만을 고집했던 것 같네···]
-
“예준이 형! 저희 이제 스탠바이 들어가야 해요.”
“아, 하민아. 벌써?”
“벌써 아닌데, 형 잔 지 한 시간 지났어요.”
“그래? 시간 되게 빨리 가네...”
“근데 무슨 꿈 꿨어요? 잠꼬대도 하는 것 같던데.”
“잠꼬대...? 나 잠꼬대하는 거 들었어?”
“아뇨 그건 아니구- 그냥 자는데 계속 웅얼웅얼 거리길래요.”
“그냥 옛날 고등학교 때 꿈. 플리들한테 더 감사하게 되는 그런 좋은 꿈.”
“어렵네요.”
“우리 하민이는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아... 뭐예여. 나만 몰라요?”
“뭐야- 하민이 삐졌어?”
“아-! 아니거든요! 하나도 안 삐졌거든요?”
“으하하핳 하미니 너 지짜 귀엽다.”
“거기 예라인! 사랑싸움 그만하고 어서 오십시다-!!”
내가 선택한 길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 받았을 때.
지금껏 흘린 모든 땀방울들이 헛된 희망을 향한 발걸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선물 받았을 때.
비로소 내가 도달한 꿈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