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야기는 나, 남예준이라는 평범한 한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오면서 느낀 희노애락을 적어둔 그저 그런 이야기다.
p.s. 소중한 나의 멤버들. 나와 같은 멤버가 되어줘서 고마워.
- 내가 “플레이브”가 되기까지 -
다른 이들에겐 이날이 별 대수롭지 않은 날일 수 있지만, 나에게 있어선, 절대적으로 의미가 큰 날이다. 내 마음속에 새겨진 숫자.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순간.
230312.
“애들아, 드디어 이날이 왔네. 여기까지 부족한 리더 따라와 주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물론 데뷔한다고 모든 게 끝은 아니겠지만, 너희와 함께 플레이브라는 그룹으로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아.”
“형...”
“너희 덕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어. 고맙다. 앞으로도 곁에 있어 주길 바라. 내가 잘할게.”
“플레이브, 스탠바이 해주세요!”
“말이 좀 길었다! 얘들아, 열심히 준비 했으니까 우리. 무대 잘하고 오자! 화이팅 한번 할까? 자, 모여! 하나, 둘, 셋-”
“플레이브! 화이팅!!”
플레이브, 올라와주세요
이날이 오기까지 나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날들. 그동안 힘든 순간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테지만, 무대를 향해 계단을 오르는 지금, 한노아, 채봉구, 도은호, 유하민 이 4명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난 너무 감사하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들과 플레이브라는 이름 하나로 불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다. 그동안 많은 생을 우린 싸우고 멀어지고를 반복했으니까.
5명이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순간이 꿈이 아니길 바라며 지금껏 준비한 노래를 불러본다.
-
1. 자발적 상실(喪失).
분명 처음에는 나 자신에게 마음을 다잡자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 같다.
“예준아. 힘내자.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조금만 힘내자. 곧 데뷔할 수 있으니까. 응?”
내겐 이 기회가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 예준아. 너 아직 아이돌 하고 싶지?”
어느날 내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아직 아이돌을 하고 싶으냐고. 당연하다. 데뷔의 기회가 무산되거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연습생으로만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그 몇 년의 시간을 좌절하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 뭐든 열심히 하면 내게 언젠가 기회는 오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보컬 연습은 기본, 작곡을 하기 위해 미디를 배우고 프로듀싱하는 방법을 배워 직접 노래를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꾸준히 작사 작곡을 하게 된 덕에 내가 만든 노래를 사용하고 싶다며 연락이 오는 소속사도 있었다.
뿌듯하다. 기분이 좋다. 내가 만든 노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작사, 작곡하는 Y.J가 아닌 아이돌 “예준”으로 나라는 사람을 알리고 싶은 건데. 기분이 좋으면서도 싱숭했다. 노래를 좋아하니까. 내 길은 음악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연습생을 그만두고 나왔어도 어떻게든 이 업계에 아등바등 발은 붙이려 해도 정말 딱, 이곳에서 내게 허용된 공간은 두 발만 붙일 수 있는 면적이라서.
“하... 나. 할 수 있나.”
그렇게 포기하려는 마음이 커지는 와중에 매번 내게 도움을 주는 정말 고마운 형에게서 아이돌 해볼 생각 없냐는 전화가 온 것이었다.
이 형은 원래 내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사용해도 되겠냐며 약 2년 전, 연락이 왔던 모 엔터의 남자 아이돌의 담당자였다. 그때 팔았던 노래가 꽤나 사랑을 받아서 종종 이러이러한 주제로 노래 내고 싶은데 들려줄 만한 노래 없냐며 사측 대표의 직책으로 연락이 왔었다.
연습생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곡, 작사가가 아닌데도 한 사람의 눈에 들어 곡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그 기회로 노래가 잘 되어 다른 소속사에서도 연락이 올 수 있게 된다는 건 정말 소설 같은 일이다. 실제로 이런 일을 겪은 당사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믿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뭐 어쨋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어쩌다 이 형과 같이 술을 한잔, 밥을 한번 먹다 보니 친분을 쌓게 되어 사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도 친한 형, 동생으로 지내왔다. 매번 내게 곡 작업하는 능력이 아까운데 이쪽이 더 맞는 거 아니냐며 차라리 프로듀서 쪽으로 아예 전향하는 것은 어떻겠냐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아이돌 할 생각 있냐고 듣게 될 줄은 몰랐지.
“네! 저 아직 아이돌 하고 싶습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러면 너 지금 시간 되니?”
“네! 됩니다!”
“그럼 주소 줄 테니까 여기로 7시까지 나와.”
“네, 형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무슨. 아직 된 것도 아닌데. 나오기나 해. 그리고 왜 존댓말 하냐?”
쿵. 쿵. 쿵. 갑자기 심장이 더 무거워진 것도 아닌데,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지는 두근거림에 괜히 마음이 설레어왔다.
“아, 미치겠네. 이러다 심장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일단 나갈 준비부터 해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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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빨리 나왔다. 전화 왔을 때가 3시 정도였으니…. 씻고 나오니 3시 20분. 머리를 깔끔하게 스타일링하고 최대한 깔끔하되,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옷을 차려입고 향수까지 뿌리고 나오니 5시. 대중교통을 타고 약속 장소 근처로 거의 다 와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6시 10분이었다.
50분이나 뜨는 시간에 뭘 해야 할까? 생각해 본다. 항상 계획적으로 삶을 살아왔다 보니 한 번도 시간이 이렇게 떠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근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 서울 한복판에서 남는 50분 동안 남자 혼자서 뭘 한다기엔 선택지가 매우 한정적이다.
“아으으- 너무 추운데….”
오늘의 약속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 한겨울에 검정 롱코트를 입고 온 바람에 멋은 챙겼지만, 입고 나와보니 추위를 많이 타는 나의 안위는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팅도 전에 곧 얼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제일 먼저 보이는 카페에 바로 들어가 몸을 녹일 작정으로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주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니, 여길 봐도 저길 봐도 거리에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원래 이 정도로 사람이 많았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더라.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잠시 화면을 켜보니 오늘은 12월 25일이었다. 잠시 꺼낸 휴대폰에 찬 공기와 맞닿은 손가락이 훅 얼어붙어 버린다. 이게 날씨가 맞나. 아무튼.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었나 싶다. 하긴, 나는 시간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곡 작업 혹은 개인 연습으로 보내는 편이라 이렇게 꾸며 입고 나온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친구를 만나 노는 것도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간신히 살고 있는 나는 아직 놀 때가 아니고 달려야 할 때니까. 내가 밖에 나가는 건 미팅 이외의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팅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작업실과 한 몸이 되어버린 나는 오늘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크리스마스이브인지 크리스마스인지 알 리가 없었다. 날짜 개념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라.
그러고 보니 이번 연도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폭염주의보라고 재난 문자는 왔었나? 작업실에 있느라 딱히 더위를 느끼지도 않았다. 계절감이라는 개념을 상실해 버린 덕에 이렇게 추울지 예상도 하지 못했다. 작업실 안은 그리 춥지 않았으니까. 내가 밖을 어지간히도 나오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재밌어 보이네.”
추위를 잠시나마 피하기 위한 카페를 찾기 위해 거리를 걸으니 왜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더 잘 보이는 느낌이다. 오늘의 길거리에는 보통 연인이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달력에 얼마 있지 않은 빨간날 중 하나니까. 상대방의 손을 잡고 걸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몰라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들.
나도 저렇게 해맑게 웃던 때가 있었을 텐데. 크리스마스라고 영업하지 않아 불이 다 꺼진 가계의 유리문으로 나의 모습이 비친다. 검정 목폴라에 검정 슬랙스, 검정 구두에 검정 롱코트. 그나마 있는 색이라곤 어두운 남색 목도리를 하고 있는 무표정, 무채색의 내 모습이. 너무나도 밝고 행복해 보이는 밝은 배경 사이 혼자만 빛을 받지 못한 듯, 어둡고 지쳐 보이는 한 사내가.
멋진 옷을 입고 비싼 향수를 뿌리면 조금은 나의 초라함이 조금은 가려질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연습생을 시작했던 10대의 나는 꿈을 이루고자 눈을 빛내며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밝았는데. 지금 나에게서는 다 꺼져가고 있는 불씨밖에 보이지 않는다. 희망 따위 모른다는 얼굴로 말이다.
얼굴에 드리운 어둠. 유리문에 비춘 나 자신이 내게 물어온다. 이번에는 정말 꿈을 이룰 수 있는 거냐고. 데뷔라는 걸 할 수 있는 거냐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말라고. 분명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설렜었다. 근데, 뭐. 음. 과연 이번에 찾아온 기회는 나를 이 힘듦 속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동아줄이 맞을까? 이번에 내려온 기회마저 썩은 동아줄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솔직히 이렇게 전화 온 거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난 그럴 때마다 매번 기대했고 또 매번 실망했으면서 뭐가 또 설렌다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나온 걸까.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한숨을 후, 하고 내뱉어본다. 그리곤 빠르게 숨을 들이마신다.
“흡!”
길 한복판에 멈춰선 사내가 갑자기 제 두 볼을 짝- 소리 나도록 때렸으니, 시선은 몰릴 수밖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조금 창피했을 수 있지만, 아니 그래도 좀 창피하긴 해.
그래도 정신 차리자! 남예준. 너가 지금 썩은 동아줄, 그냥 동아줄 가려서 잡을 때냐고. 내게 기회가 왔다는 것에 감사하자. 다시 힘이 빠진 고개를 바로 잡고 후. 짧게 숨을 내뱉는다. 마음을 다잡아본다. 넌 할 수 있어.
지금 시간은 6시 40분. 슬슬 약속 장소 앞에 먼저 가 있을까. 유리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한다. 남예준, 해보자. 결국 카페는 찾지 못했다.
“유한아!!!”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어보다 다시 발을 떼려는데 어디선가 한 여성의 큰 목소리가 들려온다. 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도로 위로 굴러가는 공 하나와 그 공을 잡으러 가려는 아이, 그 아이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 하나가 있었다.
아. 아이와 제법 거리가 있는 어머니에 비해 나와 아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발이 인도가 아닌 도로와 맞닿아 있어서 나와 가까운 거다. 지금 아이를 향해 달린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거리. 무의식에 발이 한 발짝 움직였지만 이내 이성이 발걸음을 멈췄다. 뭘 어쩌려고. 저 아이를 구하러 움직였을 때, 예준아. 너 살아남을 수 있어? 아니, 구하러 간다고 아이는 살릴 수 있나? 둘 다 살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데?
대표와의 미팅이 2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어쩌면 내가 정말 아이돌이라는 꿈을 이룰 수도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나는. 나는...
“으아아아!”
몰라. 모르겠어. 그런 거 모르겠어. 위험에 처한 애를 앞에 두고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렇게 애가 정말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두고두고 이 아이 생각을 하며 괴로워할 것은 분명하다.
“애야!! 위험해!!”
나는 있는 힘껏 달려 아이를 밀어냈다. 나의 힘에 밀려난 아이는 다행히 반대편에서 뛰어오던 어머님의 품 안에 안전하게 안착한 것 같은-. 어라. 시야가.
“꺄아악!! 차에 사람이….”
“빨리 누가 119에 신고….”
“어떡해….”
“저기요..! 저기요!! 정신을 좀 ㅊ-”
물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아, 역시 둘 다 사는 건 무리였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 그리 좋지 않다. 나를 주위로 모인 수많은 사람과 전봇대에 박혀 보닛에서 흰 연기가 나고 있는 자동차. 검정 코트를 축축하게 적혀오는 붉은 피. 약간. 드라마 주인공 같아 보이려나.
“허,”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헛웃음이 다 나온다.
드라마 주인공은 멋있게 사람을 살리고 자신도 살잖아.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도 아직 되지 못해서 죽나 봐. 결국 나는 내 꿈을 쫓아가기만 하다 죽는구나. 그럴 운명이었던 거구나. 응. 그래. 내 주제에 무슨 빛을 보겠다고 욕심을 부렸는지. 아니야. 차라리 다행이다. 더 이상 힘들게 살지 않아도 돼서. 이제는 편할 수 있을 것이다.
고생했다. 남예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조연으로써 열심히 살았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진다. 이제 죽는가 보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네. 나름-.
2. 찬란의 추락(墜落).
..뭐지. 이 익숙한.. 어. 어? 이건 우리 집 천장. 내 방 천장인데?
“억..”
너무 놀란 마음에 몸을 급하게 침대에서 들어 올렸더니 허리의 근육이 놀랐는지 조금 아프다. 진정하라는 의미로 허리를 두들겨주며 침대에서 일어나 날짜를 확인한다. 12월 25일 2시 59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잠만, 2시 59분?
우웅- 우우웅-
전화가 온다. 발신인은 역시나.
“..여보세요?”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
“아, 네. 형. ..무슨 일이세요?”
“어, 예준아.”
다음에 올 말은..
“너 아직 아이돌 하고 싶지?”
“아직 아이돌 하고 싶냐고요?”
생각한 그대로다.
“어, 뭐라고?”
“아, 아니에요. 당연하죠. 형. 저 아직도 아이돌 너무 하고 싶어요. 기회만 있다면 무조건요.”
“응,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너 오늘 그럼 시간 되니?”
“네. 시간이야 언제나 널널하죠.”
“그럼 주소 줄 테니까 여기로 나올래?”
“네. 갈게요.”
“그래. 이따 보자~”
그대로다. 과거? 전생? 아니 어제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기엔 똑같은 날인데. 이걸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갈피가 집히지 않는다. 이게 바로 웹툰에서만 보던 <사고를 당했는데 회귀해 버렸습니다?> 같은 상황인 건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일단.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나중에 이해하도록 하고 일단. 일단은, 내게 주어진 이 두 번째 기회를 잘 살려낼 생각이나 빨리 해야 한다.
씻고 나오니 3시 25분. 내 첫 번째 생의 나는 너무나도 어두운 색으로 점철한 후 밖으로 나왔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마냥 맑은 사람이 아니라 거의 어둠에 잡아먹힌 사람 같다는 인상을 줬다면 이번에는 검정 롱코트 안에 아이보리색 목폴라에 흰 슬랙스를 안에 받쳐 입었다. 마땅한 구두가 없어 신발은 그대로 검정. 그 대신 깔끔한 은색 목걸이와 시계 하나 걸쳐주고 밝은색 목도리를 하나 둘렀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생에 썼던 향수가 묵직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가볍고 상쾌한 향이 나는 향수를 뿌려주고 나왔다.
나오기 전, 현관에 있는 거울을 한 번 확인해 보니, 확실히 온통 검은색인 것보다는 훨씬 얼굴이 밝아 보이는 것같았다. 아니, 밝아 보이지는 않더라도 일단 어둠에 집어삼켜진 사람 같이 보이진 않으니까 일단 성공이다. 왠지 느낌이 좋다. 오늘은 좌절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죽지도 않을 거야. 미팅을 성공시킨다. 내게 지금 당장의 목표는 이거 하나다.
그 전에 아이를 살리는 것이 먼저.
“할 수 있어.”
가슴을 두 번 두드리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가보는 거야.”
.
.
.
아까보다 차가 덜 막혀서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래도 추운 건 여전하다. 50분 정도가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할까? 하며 고민하던 남예준은 이제 없다. 아까의 상황을 막기 위해 그 아이가 있던 곳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아이도 살아.
빠른 발걸음으로 사거리에 도착해 길을 건넌다. 아이와 엄마가 있던 곳에 30분 동안 서있느라 이대로 얼어 죽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을 정말 잠깐 했다. 그래도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저 멀리 보이는 아이는 선물을 받아 신난다는 듯, 공을 갖고 방방 뛰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아이를 향해 걸었다. 아이를 집중해서 보며 걷는데, 공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아닌가. 공을 갖고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아이의 어머님이 잠시 멈추라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걸어오는 게, ‘아, 곧 오겠구나.’ 싶은 예감은 적중. 아이들은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제 생각보다 저 위로 던져진 공에 당황하더니 제 생각보다 멀리 가는 공을 잡기 위해 달리는 아이와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춘 어머님은 아직 이 상황을 보지 못하고 계셨다. 나는 바로 공만 보고 달려가는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아직 공중에 떠 있는 공을 내가 대신 받고 도로를 향해 발을 내디딘 아이를 막아선 후, 바로 아이를 안아 올려 인도 위로 데려왔다.
아이와 함께 인도 위로 올라오니 도로 위에 보이는 익숙한 차의 실루엣. 차는 아무런 이상 없이 우리를 지나쳤고 어머니는 뒤늦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공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밖에서 장난치면 위험해. 유한아. 차에 치일 뻔했잖아. 앞으로는 길거리에서 장난치면 안 돼. 알겠지? 약속하는 거야.”
“녜...”
“유한아! 어우-!! 너는 진짜! 너 일로 와. 공 갖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이의 등을 때리시며 나무라시던 어머님은 나에게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막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시며 연신 감사를 표하며 인사해주셨다.
“아녜요.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이 손을 잡고 다니시는 건 어떠세요?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사람이 많고 또 이런 사고가 나면 안 되잖아요.”
“네, 그래야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오늘 어디 가시는 것 같은데, 뭐든 잘 되시길 바라요.”
“..네! 감사합니다.”
“가자. 유한아. 형한테 인사하고.”
“형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
“응, 메리 크리스마스.”
아무래도 조금…. 차려입고 나오긴 했지. 남이 보기에도 공들였다는 게 보이나보다. 뭐 어쨌든 아이가 죽지 않아서 너무나도 다행이다. 아까는 어머니께 티를 많이 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심장이 쿵쾅거렸는지. 속으로 정말 깊이 안도했다. 그래도 아이가 살았다는 사실과 어머님의 뭐든 잘 되길 바란다는 말씀, 아이의 크리스마스 인사 이 세 개가 모여 나의 기분을 조금은 북돋아 준다. 오늘은 정말 뭐든 잘 되려나. 그랬으면.
뿌듯한 기분을 느낄 틈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하니 6시 45분. 발걸음을 조금 빨리 옮겨본다.
-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합격이다. 아이돌 연습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내가 생각하던 방향성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기회를 얻은 게 어디야! 난 이걸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낼 생각이다.
“버추얼 아이돌을 만들 생각인데, 어쩌다 연습생 시절 예준 군의 영상을 보게 됐어요.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맘에 들고. 물어보니 성격도 좋았다던데 투자가 어그러져서 데뷔를 못했다고. 이음 엔터에서 일하던 사장이 내 동료예요. 지금 나랑 같이 일하고 있어서 어쩌다 남예준군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요. 안타까운 인재였다고. 재운이랑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지만.”
“전 아직도 너무 아까워요. 프로듀서 하나 잃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
형의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인 말을 끝으로 미팅은 좋게 마무리되었다. 사적인 이야기와 함께 식사를 조금 더 진행되던 자리는 마무리 되었다.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 이로써 나는 Vand.Ent의 연습생 남예준이 되었다.
벌써 이 회사에서 연습생이라는 걸 한지도 5개월이 되었다. 난생처음 작업실이 아닌 곳에서 연습을 하자니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힘들었지만, 행복감이 더 컸다. 그러나 내게도 소속사라는 것이 생긴 행복감도 잠시, 2개월, 3개월이 넘어가니 혼자 연습생으로 있는 것이 조금은 외롭기도, 심심하기도 했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난 지금, 대표님께서는 내게 같이 하고 싶은 연습생이 있다면 데려와도 된다고 하셨다. 흠. 진짜 그래도 되는 건가 싶은데 뭐, 내게 선택권을 주신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그 이후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역시 대표님께 먼저 제안을 듣고 난 후 생각난 노란 머리 그 애가 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야, 어디서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니까 열심히 해야지.”
예전에 나와 같이 곡을 만들던 애가 했던 말이었다. 그 친구도 아이돌이 꿈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사람들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던 애. 노래 잘했는데. 목소리가 진짜 좋은 애였다. 나는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다면 그 친구는 조금은 특색있고 힘이 있어 락이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서 완전 정반대의 소리를 잠깐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와. 너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진짜 생각 없어? 내가 다 아쉬운데.”
“트하하- 너가 아쉬우면 뭐, 너가 나 아이돌 시켜주게? 진쨔 웃기네. 뭐, 아쉽긴 한데 어쩌겠어. 나는 아이돌이 길이 아닌가부지 머. 어쩔 수 없찌! 일이나 해 남녜준- 한가하게 꿈 얘기할 때가 아니라구- 데드 얼마 안 남아따 우리?”
웃는 게 진짜 예쁘던 애였는데. 지인의 소개로 잘 나가고 있는 여자 아이돌의 노래를 전담으로 맡아 일하고 있는 팀에 들어가 잠시 한 시즌을 도와준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애다. 성격이 호탕해서 금방 친해졌었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니까.
“벌써 노아랑 안 지 2년 됐구나.”
애가 연락을 늦게 읽는 편이긴 해도 이틀, 3일 후라도 꼭꼭 답장은 하는 친구여서 꾸준히 연락을 이어나갔었다. 원래 아이돌을 하려다가 못 한 것도 비슷하고 둘이 만나서 작곡하는 시간이 재밌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동갑이라 통하는 게 많았다. 한노아의 많은 모습 중 제일 좋았던 건 자신이 하는 일을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참 괜찮은 사람이다.
얘랑은 오래 알고 싶다! 하는 생각에 나는 노아가 있는 팀에서 나온 후에도 자주 만났었다. 물론 작년부터 연락이 갑자기 되지 않았고 나 또한 이래저래 일이 많았다 보니 잠시 노아의 존재를 잊고 있긴 했지만….
“한 번 연락해 볼까..?”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한노아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 입ㄴ..”
없는 번호라고 안내하는 음성이 그리 당황하진 않았다. 카톡이 있다고는 해도 전화라는 수단으로 한노아와 연락을 시도한 건 1년만 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한노아가 있던 팀에서 잠깐 일을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물어봤던 형에게 전화해서 그 팀 리더의 번호를 얻자마자 바로 리더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노아? 나도 잘 몰라. 작년 5월 초부터 연락이 안 돼.”
자신도 노아와 연락이 안 된다고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다는 말과 노아는 재작년에 자신이 알고 지내던 형의 소개로 어떤 소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팀에서 나가게 된 지 꽤 오래됐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핸드폰을 열어 노아와 했던 마지막 연락을 찾아본다. 그래도 노아의 근황이 궁금하긴 했었는지 뭐하냐고 보낸 연락이 아직 1도 사라지지 않은 채 남겨있었다.
작년에는 곡 작업으로 매일 바쁘게 보냈던 터라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폐인이자 일에 홀린 듯 지냈었다. 그래서 그 누구와도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주변인이 뭘 하는지도 잘 몰랐고. 그래서 노아와도 자연스레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노아도 연락을 자주 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그러나 노아가 소속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 재작년 8월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재작년 5월 말, 나는 한노아 팀과 고생했다는 의미의 회식을 함과 동시에 이별했다. 잠깐 도와주러 온 거기도 하고 나는 또 내 일을 하러 가야 했으니까. 좋은 친구를 알게 되었다는 큰 수확을 얻었고 실제로 그 팀에서 나오고 나서 꾸준히 연락했던 건 노아밖에 없다.
그러니까 작년 4월까지는 분명 나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충분히 말할 시간이 많았을 텐데.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가에 관한 궁금증이 샘솟았다. 딱히 서운하진 않았다. 아닌가. 아예 서운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아만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나는 리더 형과의 전화로 한노아가 들어갔다던 소속사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 길로 바로 소속사를 향해 출발했다.
도착한 소속사에서 노아의 근황이라도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소속사에서는 한노아 이름만 봐도 치가 떨린다는 듯 반응하였고 지금 여기 없고 자신들도 어딨는지 모르니 노아 이야기를 하려면 다신 오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말도 마세요. 걔 하나 때문에 손해를 얼마나 봤는지 모르니까.”
내가 아는 한노아는 일을 칠 사람이 아닌데.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노아의 지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나를 경멸하듯 보고 있는 이 관계자를 붙잡고 더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시간을 내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 건물에서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도 뭔가 찝찝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이상한 기시감에 바로 재운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 미안해. 혹시 많이 바빠?”
“아냐. 지금은 괜찮아. 무슨 일이야?”
“아, 다름이 아니라 혹시 베댁엔터라고 들어봤어?”
“아…. 예준아. 혹시 거기서 뭐…. 너한테 연락이 온 거니?”
“아냐. 그건 아니고 제 친구가 재작년에 베댁에 들어갔는데 직년 5월부터 연락이 안 돼서.”
“베댁은 진짜 질 안 좋기로 소문난 엔터야. 연습생들 데리고 접대시키기로 유명해. 그걸로 애들 스폰받게 해서 회사가 돈 먹는. 아마 그 친구는 힘들어서 그만두고 어디 내려가 있지 않을까. 최악의 경우는 베댁에서 그 애를 업소에 팔아넘겼을 수도 있고.”
형의 말을 듣고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어쩌다 그런 회사에. 사전에 찾아보지도 않고. 물론 아이돌 연습생으로서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몰랐을까. 아니면 이유가 있었던 걸까.
우선, 이게 문제가 아니다. 소속사에서는 노아를 문제아 취급했으니 아마 소속사에서 업소로 넘겼을 것 같진 않다. 넘겼다면 손해가 됐다고 표현하지 않았겠지. 이윤이 남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노아가 소속사에도 없고 팀으로 다시 들어온 게 아니라면, 어디에 있을까. 한노아와 했던 시간 속 우리의 대화를 곱씹어본다. 분명 힌트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머리를 싸매며 노아와 있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 본다. 분명, 분명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노아가 뭐라도 말을 해줬던 것 같은데. 눈을 감고 천천히 회상해 보니, 정말 재밌는 시간밖에 없었다. 새벽 작업을 해도 둘이 있으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던 나날만이 지나간다. 내 기억 속 노아와 나는 웃는 모습밖에 없다. 참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있잖아, 나는 이제 사실 내 꿈을 이루는 거에 큰 욕심이 없어. 이젠 기회가 잘 오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정말 나중에 내가 이렇게 노래 만드는 거로라도 여기 지금 붙어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 아직 남아있지만, 아. 나 지금까지 고생했다. 잘했으니까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순간이 오면 내려가서 할머니랑 둘이 오손도손 살라고. 시골에서 사는 게 여유롭고 좋아 보이더라.”
순간 내 귀에 들려오는 노아의 선명한 목소리. 나중에 뭘 할 것 같냐는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하다 내게 조심스레 말해줬던 자신의 이야기 중 하나였다. 할머니와 둘이 살고 싶다던 말을 하던 노아는 행복해 보였는데. 아마, 지금쯤 할머니 댁에 내려가 있지 않을까.
나는 리더에게 다시 전화하여 노아의 고향이 어딨는지 물어봤다. 자세한 주소까지는 모르겠다는 말에 대충의 주소를 알아낸 후, 대표님께 잠시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말씀드렸다. 잘 다녀오라는 말씀에 나는 바로 열차를 끊고 내려갔다. 이때까지는 행복했다. 보고 싶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다는 설렘, 그런 나의 기분을 안다는 듯 몽실몽실한 구름이 둥둥 떠 있는 맑은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좋은 날씨가 나를 더 기분 좋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차를 3시간, 버스를 타고 1시간. 4시간 정도를 내려와 보는 시골의 풍경은 음, 좋았다. 시골이었다. 더군다나 6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볼 수 있는 노을 진 하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차가운 도시와는 다른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푸근한 향수의 느낌. 풀 내음과 바다의 내음이 적절히 섞인 자연의 향수 냄새는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잘 있으면 좋겠는데.”
정확한 주소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예전에 한 번 놀러 내려갔던 기억을 토대로 적어준 터라, 그 근처로 가서 어르신들께 물어물어 가야 했다. 해가 지고 있는 터라 밤이 되면 이 골목들이 조금 무서울 것 같아서 어찌 돌아다녀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노란 머리에 예쁘게 생긴 남자애 못 보셨냐고, 할머니랑 둘이 산다고 여쭤보니 동네가 좁아서 그런지 쉽사리 노아의 할머니네를 찾을 수 있었다.
“저기…. 계시나요…?”
조심스레 짙은 보라색으로 칠해진 대문을 열고 얼굴을 비춰보니 할머니 한 분이 마루에 앉아계셨다. 나의 눈을 바라보며 누구냐며 물어보시기에 바로 예의를 갖춰 인사드리며 노아 친구라고, 노아 찾으러 왔다고 차분히 말씀드렸다.
“..우리 노아 괴롭히지 말아요, 학생. 이미 충분히 힘들어한 애야.”
“..네?”
노아를 괴롭히다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골로 내려오기 전, 노아가 있던 소속사에서부터 느낀 이상한 기시감과 직감이 확신으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우리 노아…. 이제 조금 괜찮아졌는데…. 내 새끼….”
“할머니, 혹시 노아가 무슨 이-”
“할머니, 이제 추워. 들어와…. 요.”
“노아야.”
“..할머니 일단 들어가자. 나 이야기 좀만 하다가 금방 들어올게.”
“금방 들어와야 혀-”
“응. 알겠어요. 얼른 들어가 있으셔.”
노아는 일어나는 할머니를 부축하고 자신이 나온 방으로 들여보내 드리고 다시 홀로 나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대충 슬리퍼를 발에 끼우고 일어나 손은 주머니에 넣어둔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리더형이 알려줘서.”
예상했다는 듯 끄덕이는 노아.
“응. 그렇구나. 오랜만이었고 내 얼굴 보러 온 거 맞지?”
“어, 어…. 너 잘 있나 싶어서.”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데?”
“..그냥 조금 지쳐보ㅇ,”
“잘 봤네. 얼굴 봤으니까 이제 돌아가.”
“아니, 노아야 나는 너랑 같이-”
“같이 안 가. 너 혼자 가.”
단단히 가시 돋친 말과는 반대로 노아는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미소란 볼 수 없는 너무나도 차가운 얼굴. 그 누구보다 해맑던 애가, 눈에서 빛이 나던 애가, 누구보다 밝은 노아는 사라졌다. 더 이상 눈에서 빛이란 볼 수 없었다. 나를 보는 저 눈에 초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지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까. 곧장 무너질 것 같아 무서웠다.
“혹시 많이 힘들었어? 그 소속사에서 너한테 뭐 했어? 내가 도와줄게. 나랑 같이-”
“너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 까먹었어. 아니 잊으려고 노력 중이야. 그니까. 돌아가라 예준아.”
“나, 나는! ..너랑 같이 데뷔하고 싶어!!”
나의 소리침에 의해 이 공간에는 정적만이 돌았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엔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찼고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온기 따위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나, 나는….”
“....노아야…?”
“나, 나.”
“노아야. 왜 그래. 노아야. 노아야!”
“나는 이제…. 데뷔 같은 거 안 해. 안 해. 나를 버리면서. 버리면서까지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 그렇…. 그렇게 해야만…. 해야…….”
노아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우는 소리는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점점 거세지는 비에 바닥에 남는 물 자국이 눈물인지 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아는 비와 섞인 자신의 눈물이 제 얼굴에 아무리 흘러내려도 그 어떤 행동 하나 취하지 않았다. 범람하여 계속해서 흐르도록 놔뒀다. 투명한 액체가 자신의 시야를 가려도 닦아낼 생각을 굳이 하지 않는 것같았다. 그저 비를 맞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 같았다.
비에 푹 젖은 옷은 어느새 몸에 딱 달라붙어 노아의 앙상한 몸의 형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제대로 밥을 먹지 않은 것인지 너무 말라 보이는 게, 걱정이 일도록 만들었다. 말린 어깨, 굽은 허리가 노아를 더욱 왜소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제 무서워. 그만할래. 예준아.”
노아는 문드러진 미소를 띤 얼굴로, 처음으로 나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노아의 모습은 일순간 나의 심장을 멎게끔 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같았다. 저 모습은 정말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내가 힘들어하던 것은 고난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감정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그냥, 그냥 그때 같이 나올걸. 미안해. 계속 연락했어야 했는데. 내가 힘들단 이유 하나로, 미안해 내가, 내가,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노아야, 내가 어떻게 해야, 내가”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내가 감히 저 아이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을까. 저 애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밀려오는 무력감과 그저 단순히 같이하면 재미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노아를 찾아왔다는 게, 나만 행복했다는 게. 너무 미안해져서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주먹에 힘을 꽉 쥐었다.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나오려는 눈물에 그냥 눈을 꾹 감았다.
“노아야, 내가 널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3. 재가 되다:부재(不在).
여긴.. 역시나 익숙한 곳이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온몸에 너무 힘이 들어가 내리는 비가 바늘처럼 날카롭게 느껴졌었다. 등에 느껴지는 푹신함이 죄책감을 더한다. 옭아매는 죄악감이 푹신함에서 오는 편안함을 순식간에 불편함으로 만든다.
온몸을 짓누르는 부정적인 느낌에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단전에서 오르는 답답함을 몇 번의 숨으로 뱉어내니 조금은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에 이성이 돌아왔고 머리는 생각을 시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나. 한 번 과거로 돌아와 봤다고 이 상황이 그리 놀랍지 않다. 과거로 돌아오니 오히려 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오늘은..”
우선 차분히 휴대폰을 켜 확인한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지금은 2020년 11월 14일이었다. 11월 14일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있어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작업실 책상 앞 달력에 적힌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오늘은 소속사와의 미팅이 오후에 잡혀있는 날이다.
데드라인이 다가오는데 계속된 추가 요청으로 같이 작업하는데 꽤나 번거로웠던 곳이었는데. 이거 외에는..
“아,”
한노아와 같은 팀으로 일을 하지 않게 된 지 1년 5개월하고 15일, 한노아를 마지막으로 본 지 1년 5개월하고도 14일이 지났다는 말이다.
소속사에는 재작년 8월. 그니까 19년 8월에 들어갔으니 이미 1년이 한참은 지난 시기다. 지금 당장이라도 노아의 소재를 파악해야 한다. 바로 노아와의 카톡 창을 켠다. 약 6개월 전 주고받은 안부 인사가 마지막 연락이다. 소속사에서 관리하는 걸까? 아니면 이미 소속사를 관두고 시골로 내려갔을까? 시간이 없다.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만 한다.
잠깐 생각을 해본다. 저번에는 처참한 미래가 오기 직전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내가 겪었던 일이기에 빠른 시간 내로 미래를 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앞뒤의 상황을 모르는 상황이다. 이미 한노아가 소속사에 들어가게 된 지 1년이 넘은 이 시각,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번에도 내게 시간이 단 몇 시간밖에 없다면 실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어차피 확률은 50대 50. 그렇다면 나는,
“사장님 안녕하세요! 베댁 엔터테인먼트로 빨리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허허허, 아주 급한가 보네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에게 있어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택시다. 6시를 방금 막 넘은 이 시각.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 작업실에서 베댁 엔터테인먼트까지 약 45분.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와, 사장님 감사합니다!”
“허허허, 젊은 양반 예의가 좋네. 뭔지 모르지만, 너무 늦지 않았길 바라네.”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급한 마음에 택시 기사님의 말을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나를 독려해 주시는 말이었던 것 같다. 좋은 하루 보내시라며 인사드렸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내림에 죄송한 마음 반, 이해 해주시겠지, 하는 마음 반으로 나는 뛰기 시작했다.
엔터 건물 앞에 도착하니 6시 반. 이미 하늘은 어둑해졌다. 어쨌든 엔터 건물이다 보니 앞에는 경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건 맞지만, 이건 조금 심한 게 아닌가. 정문에만 4명, 건물 주위를 돌아다니는 경호원이 몇 명은 더 있어 보였다. 그
러나 회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누구냐고 물어보는 경호원에 이 회사는 사내 보안 시스템이 없이 따로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우선은 대답해야겠지.
“오늘 급하게 곡 작업 관련으로 회의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완고했다.
“..돌아가십시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라 소속사 내부로 출입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한 번 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니 사원증이나 회사에서 승낙받은 신원 카드를 보여달라는 말에 두고 왔다고 하니 더더욱 경계하는 경호원의 눈초리에 일단은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며 돌아왔다.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저렇게까지 경비를 삼엄히 하는 것일까. 한노아와 관련된 일일까.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 경호원의 눈을 피해 건물 근처에 쭈그려 있기. 그렇게 5시간이 지났을까. 12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 시간에 사람 하나, 차 하나 돌아다니지 않던 조용한 이곳에 우렁찬 정장들의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키지 않도록 머리만 풀숲에 몸을 최대한 가리고 머리만 들어 상황을 확인해 보는데 방금. 정말 잠깐 스쳐 지나간 저 밝은색의 노란 탈색모는 노아다. 한노아가 아닐 수 없다. 이내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모습을 다시 숨겼다.
첫 번째, 두 번째로 나온 차 안에는 노아가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싶어 망연자실하려는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로 나온 차가 나왔다. 앞 차들과는 조금 어긋난 타이밍으로 나오는 차에 다시 놀라 몸을 숨기는데 순간, 뒷자리에 어떠한 미동도 없이 앞좌석만을 보고 있는 한노아의 모습이 나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 속력을 갑자기 줄인 건지 몰라도 0.5배속 한 것처럼 내 눈으로 들어오는 뒷자리 그 남성은 확실히 한노아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앞의 차를 따라가달라고 부탁드렸다.
한 20분 정도 차를 타고 달렸을까. 시야에서 놓칠까, 앞 차를 집중하고 보느라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 멀리 오진 않은 듯했다. 나는 감사 인사를 놓치지 않고 차가 멈추자마자 결제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리니 굉장히 높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호텔인지 바인지. 줄줄이 서 있는 차는 하나 같이 다 비싼 차들이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공간에서 신분을 확인 중인 건지 차들은 조금 움직이다 다시 멈추고 조금 움직이다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한노아가 타 있는 차의 확인이 시작되었다.
왼편 뒷좌석의 창문이 조금 내려오더니 신분증과 비슷한 크기의 카드를 건네주는 손이 나왔다. 그 작은 틈 사이로 나온 살집이 있는 손은 한노아의 손은 아니었다. 신분을 확인하는 경호원은 꼼꼼히 대조를 해보더니 다시 카드를 돌려주고 차에 타 있는 사람에게 90도 인사를 하며 보내줬다.
그러나 나는 저 보안을 통과할 수 없고 한노아를 놓칠 수도 없다. 하지만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다음 차가 멈춰서고 아까와 같이 작은 창문 틈 사이로 카드를 건네주는 손이 나온다. 경호원이 그 카드를 받아 대조하는 타이밍에 나는 있는 힘껏 뛰었다. 차는 이미 내려가서 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뒤를 쫓기 위해선 지금 들어가야 한다.
“뭐야 저 새끼 잡아!!”
후. 죽기 살기로 달린다. 여기서 잡히면 정말 끝이란 생각으로 그 어떤 때보다 열심히 빠른 속도로 달렸다. 따로 운동을 하진 않아도 그나마 매일 하던 운동은 유산소다. 빠르다 자부할 수 없지만 체력은 나쁘지 않다. 당연히 저 덩치 좋은 경호원들에 비할 수 없겠지만, 친구를 살린다는 집념 하나로 여기에 온 나다. 이 집념은 땔감이 되어 내 평범한 달리기 실력에 가속을 붙여주었다.
날 잡으려 달려오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게 내가 지금 첩보물을 찍고 있는 것인지 좀비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진 않지만, 저 멀리 주차된 익숙한 검은 세단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 나와 함께 꿈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내렸다.
이제는 엉망이 된 호흡. 스텝이 꼬여 엉망이 될 정도로 경직된 다리 근육. 곧 날 따라오는 이들에게 잡힐 것만 같은 거리감. 꽤나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에 이쪽을 한 번은 쳐다볼 법한데 한노아는 그저 바닥만을 보고 자기를 데려가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ㅎ, 하, 한노아!!!! 가지마!!!”
주차장이 울리도록 소리치기. 크게 불리는 제 이름에 놀란 듯 제 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나라는 사람을 인지하고 난 뒤 더 커지는 눈.
“가지마!! 구해주러 왔어!! 한노아!! 나랑 가자!!!”
“이 새끼가!!”
“억-”
결국 스텝이 꼬여 바닥을 구르는 나의 뒷 옷깃을 잡고 일으키는 경호원.
“아니면!! 기다릴게!!! 기다릴 테니까!! 억-”
“조용히 안 해?!”
“윽.. ㄴ, 나와야 해!! 킄-”
“이 새끼 끌고 가.”
나를 처음에 잡은 사람은 이 경호원 무리의 대가리였는지 계속해서 조용히 하지 않는 나의 복부를 몇 대 가격하고는 데려가라며 다른 부하에게 나를 짐짝 마냥 넘기고 노아 쪽을 향해 걸어갔다. 저 경호원이 사과하는 대상은 한노아의 옆에 있던 배불뚝이 양반.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며 고개 숙이는데 기분이 좋은지 괜찮다며 경호의 등을 두 번 두들기더니 이제 가도 된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경호가 다시 한번 인사하고 등을 돌려 내 쪽으로 걸어 오자 노아의 귀에 뭐라 말하는 배불뚝이. 나를 한 번 다시 보고 배불뚝이를 보더니 이내 다시 바닥을 보고 얌전히 저 사람을 따라간다.
“기다릴-! 윽!”
“닥치랬지.”
고통에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를 짐짝처럼 어깨에 메고 1층으로 올라온 이들은 나를 무겁다는 듯 바닥으로 던졌다.
“그딴 짓 다시 하지 말아라. 진짜 다음엔 너 죽어. 방해하지 마.”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건물 건너편에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저들끼리 무언가 말이 오고 갔지만, 투명 인간 취급하기 시작했다.
사실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복부를 얼마나 강하게 맞은 건지 순간에는 숨 하나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그나마 다행인 건 솔직히 어디 하나 다리 부서져서 구석에 버려지는가 했는데 투명 인간 취급으로 건물 바로 건너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점. 건물과 가까이 있으면 나야 이득이지. 노아에게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무언가를 먹지도 않고 있는 체력, 없는 체력을 다 쓰고 맞기까지. 졸음이 몰려왔다. 자면 죽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은 조금 했지만, 한겨울이 아니라서 입이 돌아가기 까지는 않겠다 싶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휴대폰은 화면이 박살이 나는 바람에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 더더욱 시간의 흐름이 분간 가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거라곤 더 이상 이 건물로 들어오는 차는 없었고 건물 외부에도 아까만큼 경계가 삼엄하지 않다는 점. 정문을 지키는 가드를 2명 제외하고는 다 내부로 들어갔으니까. 그나저나 나오긴 하려나. 나와야 하는데.
“하..”
과연 노아가 나와줄까 싶다. 조금 한심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 힘이 없어 할 수 있는 거라곤 택시 타기와 전속력으로 뛰기, 소리 지르다 맞기 정도였으니까. 엄청 한심하게 보였으려나. 바로 전에까지의 내 상황을 상상해 보니 조금 웃기긴 했다.
구해주러 왔다며 당차게 소리쳐 놓고 고작 흠씬 두들겨 맞고 퇴장당하기가 내 역할이지 않았는가. 결론적으론 내가 막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 헛웃음도 웃음이라고 맞은 곳이 조금 아팠다. 이게 웃는 건지 기침하는 건지.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정문을 확인하는데
“어, 노아야..!”
정문을 향해 걸어 나오는 한노아가 보인다. 그러나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노아에 급히 일어나 뛰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복부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나는 한노아를 놓칠 수 없다. 구하려고 온 거니까. 최대한 낼 수 있는 속도로 뛰어가 한노아를 붙잡았다.
“아.. 으 노아야. 어디가.”
“됐어. 너랑 지금 말할 기분 아니야. 너도 가.”
“노아야,”
“이거 놔!! 너 뭔데. 너 뭔데 여기까지 와서 사람 밑바닥까지 확인하는 건데!!”
“.. 노아야. 내가 미안해. 나 나올 때 너도 같이 데리고 나올걸. 그치. 그러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됐어. ..니 잘못 아니야.”
“아냐. 같이 가자고 할 걸. 바쁘다고 나 힘들다고 연락도 잘 안 하고. 꿈을 향해 같이 나아가자 했으면서. 미안해.”
“야.. 너는, 무슨 말을..”
노아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만히 서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안쓰러웠다. 이렇게까지 힘든 삶을 살고 있을 줄 몰랐다.
“있잖아, 노아야. 늦었지만 나랑 같이 갈래? 딱 1달만. 우리 팀으로 같이 작업했을 때로 돌아가서 딱 1달만 노래 만들자. 응? 나 사실 오늘 미팅 파토 내고 왔엏ㅎ..”
“...”
“뭐.. 지금 당장은 못 믿겠지만, 내가 책임질게. 우리 같이 아이돌하자. 물론 지금 당장 돌아가면 당일에 미팅 파토 내는 애라고 일이 안 들어올 수 있는데, 그래도 딱 한 번만 응? 나 한 번만 믿어봐. 노아야. 실망은 안 시킬게.”
“..나 데리러 왔다가 그렇게 얼굴 상처 난 애 얼굴 보고 내가 어떻게 뭐라고 해. 남예준 이 비겁한 자식.”
“푸하하-! 좀 불쌍해 보이나? 뭐 그래도 노아, 너 마음 돌리는 데 한몫했다면 다행이네- 윽. 노아야..”
“뭐가 다행이야. 지금 그렇게 아파하면서.”
“괜찮아, 괜찮아. 시간 지나면 이건 괜찮아져. 일단, 나 너무 배고파. 밥 먹으러 가면 안 될까?”
“...마음대로 해.”
툭툭 튕기면서도 내 말을 따라주고 내 작업실까지 따라와 준 노아가 고마웠다. 뭐, 지금 당장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볼 생각은 없다. 아직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을 애한테 물어봤자 상처를 들쑤시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까. 천천히. 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그때가 되면 노아가 먼저 말해주겠지.
-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달이 지나 벌써 12월의 25일. 한 아이와 나의 목숨을 살리고 대표님과 만나 두 번째 Vand.Ent의 연습생이 되었다. 저번 생에는 연습생으로 들어오고 장장 5개월을 홀로 이 넓은 연습실을 사용했었는데,
“남녜준. 진짜 나 너만 믿고 들어온 거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습생이 나뿐만이 아니다. 한노아 하나 더 늘었다고 나름 이 연습실엔 온기가 은은하게 돌았다.
“그럼! 나만 믿어!”
시간이 지나, 난 대표님께 다시 한번 같이하고 싶은 연습생이 있다면 데려와도 된다는 제안을 받았다.
“누가 있으려나..”
노아는 바로 생각났다 쳐도, 정말 나는 1년간 연락한 사람이 없었다 보니,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 다시 기억해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저장된 번호를 보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날 내 휴대폰은 화면만 박살 난 것이 아니라 휴대폰 자체가 박살 나 버리는 바람에 볼 수 있는 연락망이 없었다.
“음....”
내 지인 중 누가 있을까 고민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오디션을 보러 오는 이들도 꽤 있던 것 같은데 별로였는지 새로 추가되는 연습생은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작업실에 노아를 두고 나와 주변을 산책하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내게 형이라고 크게 외치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에 서서히 보이더니 익숙한 얼굴이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형!”
“은호야!!”
“아니, 이게 뭔 일이래? 길에서 형을 다 만나는 날이 오고. 이거 인연인데요?”
사람 좋은 성격으로 다가오는 이 친구는 2년 전 아는 형과의 식사 자리에서 만나게 된 친구였다. 그리 많은 추억이 있던 친구는 아니지만, 독특한 추억을 남기기도 했고 워낙 실력이 좋았던 친구라 아, 성공하겠다 싶었던 친구였는데.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러니까요. 형님. 그동안 연락 한 번도 안 하고. 좀 섭한데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야. 뭐,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트하하! 그렇죠? 저도 연락 안 했으니까 피차일반이죠!”
“그나저나,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냈어?”
“아, 저 요 근처에서 헬스 트레이너 하고 있어요! 시작한 지 1달 됐나?”
어라…? 내가 알던 도은호라는 사람은 노래든 랩이든 뭐든 부르는 거라면 좋아하고 음악이라는 장르, 행위 자체를 너무 사랑하고 즐기던 애였는데 실력도 좋아서 절대 음악을 그만둘 일은 없겠다고 생각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도은호는 음악을 제일 잘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너 이제 음악.. 안 하니?”
음악을 하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은호는
“음, 2년 정도? 뭐,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라면서 뒷머리를 쓸어내리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짧게 해주었다. 원래 여러 팀이랑 협업해서 이곳저곳 도와줬었는데 오래 알고 지냈던 형한테 사기당해서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던 상황이 더 안 좋아지는 바람에 그만뒀다고.
“음악도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우. 언제까지고 컵라면만 먹으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컵라면 하니까 생각나네.”
“응?”
“형이 옛날에 저 안 지 얼마 안 됐는데 생일 선물 줬잖아요. 편의점 상품권. 아- 나 진짜 그거 준 걸로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형님 돈 잘 벌 때도 아니었다면서요? 연습생 그만둔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돈이 어딨다고 5만원짜리를 그냥! 턱. 주고 말이야. 그거 덕분에 잠시는 잘 먹고 다녔어요. 고마워요.”
“아냐. 지금 생각하니까 소박하긴 했네. 다음에는 더 잘 챙겨 줄게.”
“형님, 연락이나 하고 말합시다. 우리! 저는 이만 출근하러 가요!”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참, 은호는 언제나 밝은 에너지가 넘쳐났다. 저런 친구가 한 명 그룹에 있으면 참 좋은데. 뭐든 열심히 하고 의욕 넘치고. 밝은 에너지로 옆에 있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저런 좋은 기운을 갖고 있는..
아니 잠만. 실력 좋고 에너지 좋고 옆에 있는 사람의 기분도 좋아지게 하는 사람. 도은호. 도은호를 데려오면 되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멀리서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은호야!”
내 제안을
“네?”
받아들여 준다면
“혹시 같이 데뷔해 볼 생각 없어?!”
좋을 텐데.
“예?”
돈이 없다며 음악을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재능을 가진 친구다. 저 재능을 썩히는 건, 정말 음악계 큰 손실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해서든 데려와야 한다. 주변 환경에 의해 제 꿈을 접을 수밖에 없다기에, 은호는 너무나도 인재니까.
출근하러 간다던 은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플레이브라는 그룹에 대해 말해주었다. 지금 나는 어떤 엔터에 있고 현재, 같이 소속되어 있는 연습생으로는 한노아가 있다고. 플레이브라는 남자 아이돌로 데뷔할 거지만 버추얼이라는 형태로 데뷔하게 될 거고 너가 알고 있던 형태는 아닐 테지만 너와 함께라면 잘될 것 같다고. 날 한 번 믿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 단어 한 단어에 마음을 다해 은호에게 말했다.
그런 나의 진심에 은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폰을 들어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이 조용한 밤과 새벽 사이 어딘가의 시간 속 바로 앞에 서 있는 은호의 핸드폰에서 나오는 전화 연결음이 너무나도 잘 들려왔다.
2번, 3번 정도 연결음이 이어지고 끊어지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형! 바빠요?”
바쁘지 않다는 상대방의 목소리.
“그 형, 있잖아요. 저 오늘까지만 일 해도 될까요?”
은호의 폭탄 발언에 나의 눈도 커졌는데 은호와 같이 일하고 있는 관계자는 오죽할까. 정말 놀란 듯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매우 놀란 것 같은 소리에 은호는 멋쩍은 듯 웃었다.
“헤헤, 미안해요. 형. 어쩌다 보니 사정이 생겨서 꿈을 다시 좇아 보기로 했어요. 네, 네네. 하핳 진짜 미안해요. 대신에 오늘 마감은 내가 깔-끔하게 다 하고 갈게! 예! 옙! 고마웠어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끊긴 전화에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나를 쳐다보는 도은호는 내게 언제부터 들어가면 되냐고 물어왔다. 사실 음악을 그만뒀다기에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금방 해결될 줄이야 몰랐다. 물어보길 잘했다.
나는 대표님께 말씀드리겠다며 내일 바로 오면 될 것 같다고 편한 마음으로 오라고 말했다. 알려줘야 할 것 같은 몇 가지 정보를 더 안내해 주고 헤어지려는데 은호가 갑자기 제게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그 형에게 물어봐도 되겠냐며 물었다.
“실력은 보장 되어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어요. 물론 지금 제가 연락한다고 받을지도, 그 형이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뭐 그래도요. 괜찮을까요? 저에게 있어선 진짜 은인 같은 사람이어서요.”
도은호는 듣는 귀가 탁월한 사람이다. 게다가 실력 좋은 애가 또 실력 좋은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며 주변인들에게 칭찬을 자자하게 듣던 애. 당연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너가 보장하면 당연히 잘하겠지. 같이 와!”
은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일 당장은 안 될 것 같고 그 형을 조금 설득해서 오겠다 했다. 제게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 그날은 그렇게 전화번호만을 교환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전화번호를 교환한 게 무색하게도 도은호는 내 연락을 일주일간 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전화도 안 받고. 걱정 되게.”
“왜. 은호 전화 안 받아?”
“어…. 연락이 아예 안 되네.”
노아는 어쩌다 일로 한 번, 사적으로 두 번 은호와 만난 적이 있어 친분이 있다고 했다.
“한 번은 그날이잖아! 저기 뭐야. 저기, 저기. 거. 어? 여기 종사자들 모아놓고 인맥 파티하던 그 고깃집. 거기 너랑 같이 갔었잖아. 거기서 한 번 봤었지.”
아. 맞다. 그랬지. 하여튼,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된다는 나의 말에 원래 연락을 잘 안 받는 애는 아닌데 상황이 있어서 받지 않는 걸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그냥 산책 다녀와- 지금은 바쁜가보다~ 하고 생각해.”
“알았어. 갔다 올게.”
“어엉-”
원래는 산책을 이것보다 일찍 나가는 편인데, 저번에 딱 한 번 30분 정도를 늦게 산책 나간 날 은호를 만난 거라 이번 주는 지나가다 한 번은 은호를 만나지 않을까 싶어 매번 30분씩 늦게 나갔다. 물론 도은호의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은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고 나와 몇 발짝 걸었을까, 저 멀리 그립던 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은호야!”
애타게 기다린 만큼 더 반가운 모습에 크게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데 은호는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가만히 도로를 향해 서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한 마음에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해 보는데 은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일주일 전에 만났던 도은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 어디서 본 듯한 분위기. 내가 다 부서져 가는 것 같은 한노아를 시골 할머니 댁에서 봤던 그날을 연상케 했다.
“은호야..?”
나는 은호의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보지만, 아무 미동도 하지 않는 은호였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그때의 그 악몽이 다시 되풀이되는 듯했다. 초점 없는 동공. 희망이 없는 듯 항상 에너지 넘치고 웃음이 넘치던 도은호의 입꼬리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신이 다 나간 사람인 양, 아니. 시체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난 은호가 먼저 말할 때까지 얌전히 옆에서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형,”
“..응. 은호야.”
“있잖아요, 나로 인해 모든 게 망가진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요?”
“...”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해준, 꿈이라는 걸 꿀 수 있게. 꿈이라는 걸 꾼다는 행위가 왜 아름다운지, 꿈이 있는 사람은 왜 빛이 나는지 알려준 사람이에요. 근데,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사람이 빛을 잃었어. 내가, 내가 그놈의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나만 안 만났어도 계속 빛났을 사람인데. 그 사람도 사람한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래서 나 같은 애한테 너무 기대고 있었나 봐. 날 너무 많이 믿었나 봐요. 제일 곁에서 오래 봐온 나까지 꿈을 포기하는 바람에 두려움이 몰려왔나 봐.”
아마. 은호가 같이 하고 싶다던 사람의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 둘의 모든 서사를 알 수 없어도 확실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얼마나 서로에게 진심인지도. 그만큼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있잖아요, 나는 나 하나 그냥 꿈 포기하고 돈 벌어와서 형 계속 빛나라고. 형은 포기하지 말고 꿈 이루라고. 그렇게 해주려고 했어요. 나보다는야, 그 사람이 백배는 더 아이돌이랑 어울렸으니까. 그만둔다고 할 때, 엄청나게 싸우기야 했어도 내 구원자였던 사람을 어떻게 떠나요. 지금 당장은 내가 미울 테니까. 그러니까 잠깐. 진짜 잠깐만 떨어져서 돈 벌어올 테니까. 그동안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삶의 구원자였던 사람이 나 자리 잠깐 비웠다고 그렇게 될 줄 몰랐지. 내가 뭐라고. 내가 뭔데!!”
시골로 내려가 한노아를 봤던 그때. 반짝이던 이가 어둠으로 물들어 모든 빛을 잃었던 그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러나 은호와 은호가 말하는 은호의 구원자 관계라면 그만큼 더 충격이었겠지. 아마 나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암담할 것이다.
“형. 내 구원자가 우울증이래. 저기 대학병원 정신병동에서 치료받고 있대요 지금. 근데 치료 받는 것도 거절하고 있대. 병원에 그 사람 보러 갔다가 화가 끝까지 차올라서. 너무 속상해서 미친놈이라고 화도 내고 욕도 했는데. 그래서 나 끌려 나가는 것도 그 눈으로 끝까지 봤으면서 입을 한 번 안 열었어요. 눈은 날 보고 있는 게 맞는데. 날 보지 못하는 것 같았어. 스스로 어둠으로 들어갔어. 동화가 됐다고요.”
“..은호야.”
“빛과 어둠이 어떻게 동화를 해? 그게 어떻게 돼요. 진짜 미안한 말인데요. 나 때문에 지금 사람 하나가 망가졌는데 나 혼자 행복 하려고 꿈을 꿀 수 없어요.”
“은-”
“죄송해요. 형이랑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터벅 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가만히 은호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신이라면 꿈꾸는 자를 도와줄 텐데 대체 무슨 권리로 이렇게까지 시련을 주는 거냐고. 대체 꿈꾸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꿈을 꾸는 게 무슨 죄가 있어서. 그저 하고 싶은 걸 쫓아 온 것뿐인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은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그저 멍때리기만 했다. 대체 뭘 해야. 이번엔 자신이 무엇을 해야 다시 한번 꿈꾸는 자를 살릴 수 있느냐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찾아오는 무력감. 왜 내겐 고난과 역경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 따위 없는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만히 은호가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은호가 꿈을 포기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은호의 구원자라는 그 사람도 다치지 않는 거 아닌가.

